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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국보·보물 지정제도의 역사와 의의

Skin Demo 6 2020. 8. 26. 16:31

삼공불환도 (문화재청 제공)

2018년 10월 4일, 조선 후기 화가 김홍도(金弘道, 1745~1806 이후)가 그린 <삼공불환도(三公不換圖)>가 보물 제2000호로 지정됐다. 지정 번호는 지정 순서에 따라 정해지기 때문에 문화재의 가치를 반영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인 1933년부터 시작된 지정제도가 1962년 「문화재보호법」 제정을 계기로 폐기되고 이때부터 정식제도가 시행된 지 56년 만에 2,000종의 보물이 지정된 사실은 우리나라 국보․보물 지정역사를 뒤돌아보게 하는 계기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그렇다면 <삼공불환도> 처럼 문화재가 국보나 보물로 지정되기 위한 요건은 무엇이며 이는 한국지정제도의 흐름과 어떠한 연관이 있을까? 마침 올해 6월 문화재청과 국립중앙박물관은 2017년부터 2019년까지 3년간 지정된 국보와 보물 100여 점을 소개하는 「신규 지정 국보·보물 특별전」을 공동 개최한다. 이 글에서는 특별전을 계기로 한국 국보·보물 지정제도의 역사와 의의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다.


국가지정문화재 지정의 범위와 국보·보물

'지정(指定)'은 보존 가치가 높은 문화재를 일정한 제도권 안에서 영구적으로 보호하고자 마련한 제도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일제강점기부터 시행된 법령이 광복 후 수정을 거쳤으며, 1962년 정식 법제가 마련되어 지금까지 현실에 맞게 꾸준히 개정되면서 체계가 갖추어졌다. 체계상 ‘국가지정’과 ‘시도지정(지자체 지정)’으로 이원화해 국가에서 미처 관리하지 못하는 중요문화재를 지방정부에서 관리하는 보완적인 시스템으로 운영되고 있다.

한국에서는 문화재의 지정과 관리 등 전반적인 사항을 1962년에 제정된 「문화재보호법」에 근거해 시행하고 있다. 이 법에서는 ‘문화재’를 '인위적이거나 자연적으로 형성된 국가적·민족적 또는 세계적 유산으로서 역사적·예술적·학술적 또는 경관적 가치가 큰 것'으로 정의하고 있다. 이는 곧 한국의 문화재 지정 범주와 연결된다. 역사적·예술적·학술적 가치가 큰 것은 국보·보물·사적·천연기념물·국가민속문화재 등과 같이 유형(有形)의 문화재로, 경관적 가치가 큰 것은 ‘명승(名勝)’으로 지정되며 모두 국가지정문화재의 범주에 해당한다. 이를 통해 김홍도의 〈삼공불환도〉는 유형의 문화재로서 역사적․예술적․학술적 가치가 인정되어 ‘보물’로 지정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문화재청은 여기서 더 나아가 기술과 정신문화 가치를 존중하여 ‘무형문화재’ 지정제도도 함께 운영하고 있다. 유형문화재 중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것은 보물로 지정되고, 이 가운데 인류문화의 관점에서 가치가 크고 유례가 드문 것은 다시 국보로 지정된다.

이처럼 국보나 보물 개념으로 문화재를 등급화하여 지정하는 제도는 세계에서 한국과 일본뿐이다. 중국, 미국, 유럽 국가들이 유적이나 건축물을 대상으로 나름의 보호제도를 운영하고 있으나 한국과 일본만이 회화, 조각, 서책 등 동산문화재를 포함하는 지정정책을 시행하고 있다. 단, 일본은 1940년대 법령 개정을 통해 ‘보물’ 대신 ‘중요문화재’라는 명칭을 사용해 오고 있어 ‘국보’, ‘보물’의 명칭을 사용하고 있는 나라는 한국이 유일하다.


국보·보물 지정제도의 역사

한국의 국보·보물 지정제도의 흐름은 총 3기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제1기는 지정제도가 처음 도입된 일제강점기로서, 1933년~1945년 기간이 해당한다. 이 기간은 일본에 의한 한국 문화재의 약탈과 고난의 시간이었으며, 지정제도 역시 이러한 과정에서 처음 시행되었다.

일본은 19세기 말부터 자국 내 문화재 보존과 해외 유출을 막고자 각종 문화재 관련 법령을 마련하였다. 그리고 1910년 조선을 식민지화하면서 이 방침을 적용하였다. 1916년 「고적 및 유물보존규칙」을 만들어 조선 전역에 걸쳐 파악한 문화재의 현황을 대장에 등록하는 작업을 추진하면서 전국의 삼국시대 고분이 도굴당하고 수많은 문화재가 원위치를 잃어버린 파괴 현상이 일어났다. 1916년 성덕대왕신종의 이전, 1926년 문화통치의 한 전략으로 스웨덴 황태자에게 공개된 경주 서봉총 고분 발굴 현장 등은 모두 한국 문화재의 수난을 상징한다.

좌 : 1916년 성덕대왕 신종 이동 우 : 1926년 서봉총 발굴 현장 (문화재청 제공)


이후 일본은 1933년 조선총독에게 한국 문화재에 자의적이고 강력한 권한 행세를 부여하는 법령인 「조선보물고적명승천연기념물보존령」을 만들었다. 내선일체(內鮮一體)를 명분으로 일본의 지정제도와 같이 ‘보물’, ‘고적(古蹟)’, ‘명승(名勝)’, ‘천연기념물’로 구분했고, 일본 자국에서 ‘국보’를 조선에서는 ‘보물’로 낮춰 불렀다. 이 법령에 따라 1934년~1943년까지 총 12회에 걸쳐 보물 419건, 고적 145건, 고적 및 명승 5건, 천연기념물 146건, 명승 및 천연기념물 2건 등으로 모두 717건이 지정되었다.

제2기는 광복 후 미군정기(美軍政期, 1945.9.8.~1948.8.14.)에서부터 1962년 「문화재보호법」이 제정되기까지 기간으로, 지정제도의 과도기에 해당한다. 1945년 8월 일본의 패전(敗戰)으로 광복을 맞이한 한국은, 같은 해 9월부터 시작된 미군정 3년을 포함해 1961년까지 약 17년 동안 일제의 문화재 규정을 대체하기 위한 법령 제정을 거듭 시도하였으나 끝내 완성하지 못했다. 그러나 국가지정문화재의 기준을 제시하고 국보 외에 ‘보물’을 법적으로 구분하는 등 이후 관련 법안의 기초가 된 중요한 시기이다.

제3기는 1962년 「문화재보호법」 제정과 자문기구인 ‘문화재위원회’가 출범한, 한국 지정제도의 정식 출발 시기이다. 「문화재보호법」은 헌정사상 최초로 한국 정부가 만든 문화재 관련 법령이라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가 있다. 이 법률에 따라 국보·보물의 지정 기준, 지정 또는 해제 절차, 지정문화재 기록 보존과 신청자료 제출, 그리고 중요문화재의 임시지정[가지정假指定]에 관한 구체적인 내용과 절차 등이 규정되었고, 오늘날까지 기본 골격이 유지되고 있다.

아울러 자문기구인 문화재위원회를 구성하고 위원회의 심의에 근거해 국가지정문화재를 지정하는 절차를 확립하였다. 문화재위원회가 가장 먼저 수행한 일은 일제강점기에 지정되었던 보물 가운데 116건을 1962년 12월 20일 자로 ‘국보’로 지정한 것이다. 이때 일제가 보물 1호로 지정했던 남대문(현 숭례문)이 국보 제1호로 지정되었다. 또 국보로 지정되지 않은 약 400건의 구(舊) 보물은 보물로 지정해 보존하기로 했으며, 일제강점기 보물로 지정된 북한 소재 보물 67건에 대해서는 재지정을 보류하였다. 이듬해 1963년 1월 21일 자로 ‘서울 흥인지문’ 등 423건을 보물로 다시 지정하였고, 1971년 3월 1일에는 통일을 대비해 북한의 지정대상 주요문화재 파악을 위한 예비적 성격으로 ‘개성 남대문’ 등 52건의 북한 문화재를 지정·공포하였다. 이렇게 1962년 첫 국보·보물이 지정된 이후 2020년 4월 현재까지 국보 345건, 보물 2,194건 도합 2,539건이 지정되었다.

오늘날 국보·보물의 지정

국보와 보물의 지정 현황을 시기적으로 살펴보면 몇 가지 주된 특징이 파악된다. 먼저 1960~70년대에는 황남대총 북분 금관(국보 제191호), 백제 금동대향로(국보 제287호) 등 발굴문화재가 주로 지정되었다. 1980~90년대에는 천상열차분야지도 각석(국보 제228호), 창경궁 자격루(국보 제229호) 등 과학기술문화재, 경복궁 근정전(국보 제223호) 등 건축문화재를 비롯하여 기지정문화재 중에서 상대적으로 소외되었던 분야와 개인 소장 전적 문화재의 지정이 많았다.

2000년대부터는 개인이나 지자체가 신청하는 문화재뿐 아니라 문화재청이 각종 조사와 업무협약 등을 통해 적극적으로 지정대상을 확대하여 국가지정문화재 제도권으로 흡수된 사례가 증가하였고, 국보 승격 추진 등을 통해 선제적으로 가치를 발굴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궁능‧사찰·서원 문화재 및 조선왕조 의궤 등 다량문화재 전수조사, 달항아리·고지도·초상화·옛 글씨 등 분야별 일괄 공모, 국립박물관과 간송미술문화재단 등과의 업무협약을 통한 지정을 예시로 들 수 있으며, 그 결과 고고유물이나 전적문화재에 주로 치중되어 온 지정 대상이 한층 더 다양화되고 시대별·분야별로도 균형을 맞추어 나가게 되는 긍정적인 효과를 보여주고 있다.

이번 특별전에도 최근 이러한 지정경향이 반영된 작품들이 다수 선보인다. 몇 가지 주된 사례를 살펴보면, 2017년도부터 본격적으로 추진한 국보 승격 및 환수문화재 가치 발굴의 일환으로 국보 제151호 <조선왕조실록>에 추가 지정된 ‘적상산사고본 실록’ 4책, ‘부여 왕흥사지 출토 사리기’(국보 제327호)를 비롯해 미국으로부터 환수된 대한제국 국새인 보물 제1618-2호 ‘국새 황제지보’ 등이 포함되어 있다. 이밖에 ‘논산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국보 제323호)의 경우 일명 ‘못난이 석불’로 불리며 대중에게 친근한 대상으로 널리 인식되어 왔으나 투박한 가운에 섬세함이 숨어 있는 고려 시대의 미감(美感)을 재평가해 국보로 승격되어 많은 화제를 낳기도 했다.

문화재청이 2002년부터 추진한 ‘전국 사찰 소장 불교문화재 일제조사’의 결과물 중 2014년부터 실시한 ‘전국 사찰 소장 불교목판 조사’에 따른 지정 목판문화재를 포함해 2017년 간송미술문화재단과 업무협약을 통해 지정된 22점도 대상에 포함되었다. 조선 시대 서화작품을 전문적으로 소장하고 있는 간송미술관의 특성을 살려 그동안 지정에서 소외되었던 정선, 김홍도, 신윤복, 김정희 등 조선 시대 대표 작가들의 작품이 재조명된 기회가 마련되었다.

좌 : 숭례문 우 : 흥인지문 (문화재청 제공)


한편, 국보나 보물의 지정은 해당 문화재의 가치를 발굴하고 보존관리 시스템을 마련한다는 긍정적인 측면도 있으나, 도난과 은닉, 진위문제 등으로 본래의 지정목적을 흐리게 하는 경우도 있다. 이는 정책변화로 이어지기도 한다. 대표적으로 국보 제274호로 지정된 ‘귀함별황자총통(龜艦別黃字銃筒)’이 모조품으로 밝혀지면서 1996년 해제되었던 사례를 들 수 있다. 이 경험을 바탕으로 ‘지정예고제’가 도입되었다. 문화재위원회의 지정 심의 이전에 심의할 내용을 관보에 30일 이상 예고하여 당사자들의 의견을 듣도록 법령이 개정된 것. 아울러 문화재청은 신청 문화재의 정당한 소유 관계나 연혁, 도난문화재 여부 등을 파악하기 위해 취득경위서 제출을 의무화 하고 객관적 판단을 위해 과학적 조사를 제도화하는 등 지정과정을 투명하고 타당성 있게 진행하기 위한 제도개선을 지속적으로 수행하고 있다.

왕흥사지 출토 사리기 (문화재청 제공)
경복궁 근정전 (문화재청 제공)


국보·보물의 지정은 해당 문화재의 영구한 관리를 법적으로 보호하는 기반을 제공하고, 한국문화사의 주요 사실관계를 대표적 유적이나 유물을 통해 시각적으로 증빙해주는 척도로서 역할 한다는 점에서 파급 효과가 크다. 최근 문화재청은 국보·보물의 객관성을 높이고자 동종(同種) 문화재 비교 조사 등을 한층 강화하여 해당 문화재의 명확한 가치 규명을 위해 노력하고 있으며, 다양한 분석기술의 발달에 힘입어 과학적 조사를 제도화하고, 인문학적인 안목 감정을 보완하는 등 문화재 해석에 대한 지평을 넓히고 있다.

 

좌 : 황남대총 북분에서 출토된 금관 우 : 백제 금동대향로 (문화재청 제공)


국보·보물은 국·공유가 아닌 개인의 소유물일지라도 선조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인 만큼 모두 함께 공유하는 공공재(公共材)로서의 성격이 강하다. 박제된 문화재가 아닌 살아 숨 쉬는 문화재는 모든 국민이 지키고 향유할 때 빛을 발한다. 이러한 공통적인 목표를 위해 근래 몇 년 동안 문화재청과 국립박물관은 전시를 통해 지정문화재 공개를 활성화 해왔다. 이번 「신규지정 국보·보물 특별전」을 통해 한국의 문화재 지정정책을 이해하는 한편 자국의 문화유산을 미래세대에 온전히 전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 고민해보는 시간이 되기를 바란다.


Text by 황정연, 문화재청 학예연구사
Photos by 문화재청